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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김정희

야수II 2023. 5. 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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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김정희

1884년
김정희
개인소장 - 국보 180호
 
중앙박물관에서 실물은 본 것 같은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
제주도 유배시절에 제자 이상적이 중국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려준 것이라 한다.
이상적이 너무나 기뻐서  북경에 가져가 중국의 명사 16명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찬시(讚詩)를 곁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훗날 이 그림을 본 사람등의 글들도 추가되었다고 한다. 당대 유명인의 시와 감상문이 덧붙여져서 그 가치가 최고조로 올라갔겠지....
 
여기에는 수많은 김정희의 호중에 완당 (阮堂)이라는 호가 사용되었다.
 
김정희의  친아버지 김노경 ( 김정희는 김노경의 형 김노영의 양자로 갔다 )과  청나라 사절로 갈 때 함께 따라갔다.
순조 9년(1809년) 말, 연경에 도착한 김정희는 맨 처음 청나라의 젊은 학자 조강을 만났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옹방강과 완원이었다. 옹방강은 학계의 원로로 경학과 문장에 능하고 특히 금석학과 서화, 시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청나라의 학풍은 한나라 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 명대의 성리학을 배척하는 풍토가 주류였는데, 옹방강은 두 가지 입장을 절충한 학풍을 견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정희가 연경에 도착한 이듬해에 만났는데, 그때 옹방강은 78세의 노인이었고, 김정희는 겨우 25세였다. 옹방강은 한. 송 절충의 학풍과 금석학 및 서화로 추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완원은 내각의 대학자를 거치고 태자(太子)의 교육을 맡았던 인물로 경학의 대가였다. 당시 49세의 장년이었던 완원은 청년 김정희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극진히 환대하였다고 한다.
김정희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극진히 환대하였다고 한다.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옹방강의 호인 담계(覃溪)와 보소재(寶蘇齋)를 본떠서 자신의 호를 보담재(寶覃齋)라 짓기도 하고, 완원의 완(阮) 자를 따서 완당(阮堂)이라고 했다. 
 

 
왼쪽의 발문 (跋文) 해석 ( 펌글 ) 
작년에도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 주었고, 올해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 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라니 세상의 도도한 인심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과 힘을 썼거늘, 이것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런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세한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주거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때 급암과 정당시 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흥하고 쇠하였으며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 붙인 것은 세상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세한도 ( 펌글 )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살았다. 그리고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 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淸朝文化東傳의 硏究(청조문화동전의 연구)」(원제: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 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끊질 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신발이 해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양보해 달라고 매달렸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요, 대 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조상의 예술 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추 키는 데는 그 시대, 몇 안 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死地)였다. 손재형은 물어 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말이 병문안이지 사실은 세한도를 문안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목적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매일 눈만 뜨면 찾아가 인사를 하기를 일주일, 수상히 여긴 후지즈카가 드디어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요?" 
기회를 엿보던 손재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무겁게 털어놓았다. 얼굴에는 비장한 의지가 감돌았다.
  "세한도를 양보해 주십시오."
  "뭐요? 그 그림은 내가 정당하게 입수한 물건이요.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후지즈카가 일어나 앉았다. 눈빛에는 추호의 양도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재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손재형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 집을 나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들리고 거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손재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지독한 상황까지도 각오한 그였다.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가 세한도를 양도해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백 여일 가까이,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손재형의 열성에 후지즈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소. 하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을 하겠소." 
긴장한 손재형을 후지즈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거든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 주라고 하리라.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주시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동경의 전세는 날이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그 와중에 세한도가 온전히 살아남을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려왔다.
  "후지즈카 상, 기왕에 넘겨주시기로 결심했다면 당장 넘겨주시지요." 
그러자 후지즈카는 단호하고도 매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림없는 말,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물러가시오." 
손재형은 다시 후지즈카의 집을 물러 나왔다. 그는 마지막 조율을 가다듬은 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후지즈카에게 문전 축객을 당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생각하고,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굳게 닫혔던 후지즈카의 집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김정희의 혼이 배인 명품이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손재형이 얼마의 돈을 주고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만약에 그때 세한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랑스러운 국보 한 점을 영원히 잃을 뻔하였다.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그 즉시 오세창에게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배관기를 써 주었다.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 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왔노라."
 
세상 물건에는 모두가 때에 따라 주인이 있는 법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 끝에 돼 찾아온 세한도도 그 후 너무나 어이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을 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 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일약 정치가로 활약했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 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게 할 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개성 사람, 이근태(李根泰). 그는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이근태는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고 또 들고 온 고서화 모두가 국보급 미술품이라 남의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저당 잡힌 고서화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다.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꾸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수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180호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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